나는 성악설을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악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어떤 특정 환경에 의해서만 악한 성향이 발현된다고 보지도 않는다. 나쁜 사람도 있지만 착한 사람도 있고, 다만 나쁜 사람은 환경에 상관없이 나쁜 짓을 한다.
또한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지하철에서 임산부에게 자리 안 비킨다고 삿대질하는 어르신들이 청년시절에는 멀쩡하고 남들을 배려하는 사람들이었을까? .. 결국 배려라는 것은 한 방향이 아니기에, ‘내’가 더 중요한 사람들은 20대에도, 혹은 60대가 되어도 똑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된다. 가끔 지하철에서 나이를 권리로 생각하는 자꾸 이상한 분들이 눈에 띄는데, 그냥 그 사람들은 20대 청년 시절에도 막무가내였던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냥 세월이 지나 나이를 먹은 것이지, 세월이 사람의 현명함이나 성숙함을 만들어주진 않는다.
그렇기에, 나쁜 사람을 만났을 경우 가장 최선의 전략은 그냥 피하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굳이 서로 삿대질하며 싸울 필요는 없고, 자리를 내어주면 된다. 고작 내가 잃을 수 있는 것은 잠시 서서 퇴근하는 수고로움 뿐. 물론, 걸린 것이 단순히 ‘앉아서 가는 퇴근 길의 평화로움’ 이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또 삶의 다른 부분들이,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나쁜 사람들과의 대립이 피치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러한 피치못한 싸움에서 삶의 노곤함이 더해진다.
그런데 과연 ‘나쁘다’, ‘악하다’ 라는 것의 기준이 무엇일까? 세상에 ‘내’가 제일 중요한 것, ‘내’가 제일 옳거나, ‘내’가 제일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악함에 근원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 절대 옳은 가치란 생각보다 별로 없고, 절대적으로 누군가 항상 옳을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기에 대접받아야 하고, ‘나’는 제일 많이 알고 있기에 내 의견이 항상 옳다고 주장하게 되면, 세상은 ‘너’와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 아닌, ‘나’만을 위한 공간이 된다. 그것이 성악설의 세상이다. 극단으로 가면 내 감정의 해소를 위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 될 것이고, ‘내’가 맞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모두 상황에 상관없이 자리를 양보하는 것만이 올바른 것이 되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0과 1의 짜여진 흑백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내’ 주장을 하고 ‘내’ 가치를 드러내는 곳 이상의, 이하의 공간도 아니다.
때로 특정 환경이, 또는 특정 조직이 사람에게 나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거나 그런 상황을 방조할 수 있다. 어떤 개개인의 악함이 조직의, 사회의 악함으로 전이되어 가는 과정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그런 일들은 사실 크고 작은 조직에서 진행되어 왔고, 작게는 초등학교에서 이지메가 행해지는 교실이나 크게는 나치 아래서의 독일처럼 열거할 수도 없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다만, 그 공통점은 조직적인 이러한 ‘전이’ 앞에는 다수의, 그룹의 나쁜 사람들, ‘내’가 중요한 사람들 – ‘내’가 너무 중요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우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 – 이 모이는 것이 필수선결 과제이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 들릴 것 같지만, 이러한 경우 대부분 ‘조직’을 위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으로 포장되지만 그 안에는 지독한 ‘내’가 중심이고, ‘내’가 순혈이라는 사상이 들어가 있다.